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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10_[뷰.펠 2기] 박정화 뷰티풀펠로우


 
 

내가 광고를 잘 만드는 것이 정말 사회적으로도 잘하는 건가?
스스로에게 화두를 던지고 나서 나는 도전을 생각했다.

 
 

박정화 펠로우는 매우 화려한 길을 걷다가 갑자기 노선을 180도 바꾼 인물이다.
나에겐 ‘왜?’ ‘어떻게’ 를 가장 많이 붙이고 싶은 펠로우다.
사무실을 새로 얻은 후 6월 7일 오후 명동에서 인터뷰를 위해 그녀를 만났다.




미술을 전공하시고 유명 광고제작사에서 촉망받는 CM 플래너로 활동하시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변신하셨어요. 정말 ?” 가 바로 나옵니다. “왜죠?” 
정말 좋고 마음에 드는 회사였어요. 직접적인 계기라고 하면어느 날 4대강 홍보제작 의뢰가 제 앞으로 떨어졌어요. 팀장에게 못하겠다고 했죠. 그날 이후였던 것 같아요. 사회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광고회사에선 충격적인 것입니다. 거액의 광고 의뢰에 NO를 할 순 없어요.


왜 못하겠다고 했나요? 
사회적으로 아주 중요한 이슈가 있던 때였어요. 그 큰 사건에 대해 전혀 언급되지 않더라고요. 당시 제가 느끼기로 광고업계는 완벽히 분리된 사회였어요. 철저히 자본에 종속되고 그것이 전부인 세상. 그래서 내가 무엇을 위해 광고를 하고 있나?’ 하는 질문을 던지게 되었죠. 그런 생각을 시작할 무렵에 4대강 제작 의뢰가 왔던 거죠.


단지 그런 이유때문인가요? 
사실 그 전까지 저에게 광고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정말 매력적인 일이었거든요. 그래서 전 광고를 정말 잘 만들고 싶었어요. 지금도 그렇구요. 광고를 플래닝하기 위해 여러 분야를 열심히 공부해야 했어요. 인문학도 마찬가지구요. 아이러니 하게도 광고를 잘 만들기 위해 공부를 하다가 세계관이 바뀌면서 광고 만드는 일이 괴로워 진거에요. 정말 대기업의 광고만 보이고 빈익빈 부익부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광고가 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내가 광고를 잘 하는 것이 정말 이 세상에 잘하는 건가? 고민하다가 거절하게 된 거죠

 
광고의 문제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자본주의가 완숙기가 됨에 따라 거대자본이 블랙홀처럼 모든 주변부를 빨아들이는 겁니다. 거대자본만 남죠. 그게 광고에서 그대로 적용됩니다. 그래서 양극화가 생기는데요. 그 광고를 통해 제품의 가격이 올라가는 것뿐만 아니라 소비자에게 그 제품에 대해 감성적으로 호감을 갖도록 만듭니다. 결국 거대 자본의 논리가 감성적으로 파고들어 문제를 문제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자본의 논리를 감성적으로 옳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즉 인간의 행복보다는 자본주의에 필요에 따라 인간의 감성을 재배열하는 거죠. 그리고 어떤 관점에선 광고는 거대기업이 미디어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 되기도 하구요.


그래서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이 사업을 구상하신거군요? 
. 앞서 말했던 것처럼 빈익빈 부익부를 광고가 더 가속화 하고 있죠. 그럼 내 스스로가 광고를 안해야하나? 라고 고민했지만 전 아니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광고는 그냥 수단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광고를 통해서 양극화를 완화해보자!’ 라고 생각했습니다.


여기에서 어떻게가 나와야겠군요. 광고를 통해 어떻게 완화할 수 있죠? 
우선 제가 생각한 방법은 중소기업을 위한 광고를 만드는 겁니다. 멤버쉽을 통해 회비와 후원금을 받고 일 년에 몇 개 업체를 선정해 무료광고를 제작할겁니다. 그리고 무료가 되기 위해 매체비용을 없애야 합니다. 유튜브와 같은 오픈플랫폼을 이용할거에요. 놀라운 광고적 발상이 협동연대를 만나면 가능하다고 봅니다.


유튜브라는 것이 능동적인 사람에게만 오픈되어 있다는 점에서 반 수동적으로 방송하는 매스미디어 광고와 경쟁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맞습니다. 그래서 크리에이티브가 중요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세상에 없던 크리에이티브를 생산해 내고 주목하게 만들어야죠. 그 광고 때문이라도 찾아서 보게 만들어서 광고주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만들어야죠.


그렇다면 어떻게 수익을 낼 것인가요?

사실 조금 어려운 부분입니다만 주 수입원은 회원제로 회비를 받을 생각입니다. 후원금도 받고요. 회사 이름도 자본으로부터 독립하자라는 의미의 INDIE CF입니다. 공익광고 등도 만들 거구요. 제작 공정을 조금 더 슬림화 하면 제작비도 많이 줄일 수 있을 겁니다. 많은 도움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너무 딱딱한 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이제 좀 개인적인 얘길 해볼게요. 유년시절은 어떠셨나요?
어린 시절은 평범했지만 많은 분들이 그러시겠지만 저도 IMF세대입니다. 아버지가 크게 건설업을 하셨는데 부도가 나면서 속된 말로 길바닥에 나앉았죠. 그게 중2정도에고등학교때도 끼니마다 라면정도 밖에는 못 먹었어요. 3때는 더 어려워져서 가건물에서 살았어요. 그러다가 대학을 가야하나? 갈 수는 있나? 가도록 할 수는 없을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경제적인 면이 매우 고민하게 만들었군요 
경제적인 면도 그렇지만 성적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고 삶이 그러다보니 의지도 많이 꺾여있었죠. 그러다가 내가 좋아하는 것보다 내가 잘하는 건 무엇일까를 생각해봤고 그게 그림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고3때 이과였던 제가 미대를 가겠다고 결심했죠. 그게 제가 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았던 것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미술선생님께 찾아갔어요.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생존을 위해 잘할 수 있는 것을 선택했다는 것에서 좀 서글프네요.
저는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 그렇게 애썼던 것 같아요. 그렇게 미술선생님을 찾아가서 내 상황이 이렇지만 미술로 대학을 가고 싶다고 말했더니 당시 미술선생님이 그길로 본인 차를 태워서 어떤 작고 신생인 미술학원에 데려다 주었어요. 잘 부탁한다며


미술선생님이 매우 적극적이셨네요. 하하 그 미술학원에서는 어떠셨어요?
경제적으로 어려우니까 학원비를 못냈죠. 그래서 학원 원장님께 말씀 드렸어요 ‘3개월만 지켜보고 판단해라. 그리고 당신이 가라고 하는 대학에 진학하겠다. 학원으로서도 좋지 않느냐?’.. 당찼죠? 당시에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요. 원장님이 흔쾌히 허락해 주셨어요. 제 인생에 첫 번째 펀딩입니다.


제가 알기론 미술학원은 여러 가지 재료비들도 많이 드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래서 다른 사람이 썼던 종이의 뒷 면을 이용한다던가 미술학원에서 남는 연필이나 교구를 사용했어요. 매일 어머니께서 하루 차비와 식비로 2,000원씩 주셨어요. 그 돈으로 무엇을 과외로 한다는 것이 어려웠죠. 하지만 그 당시가 제가 가장 열심히 산 삶이었던 것 같아요.
그냥 다른 것 신경 안쓰고 집중할 수 있었어요.
 

그렇게 대학에 진학하시고 지금의 길로 오신거군요?
평탄하지는 않았어요. 마침 그 고3때 어머니가 과로로 쓰러지셨어요. 저에게 매일 2,000원이라도 주고 생활비를 버시기 위해 쉬지도 못하고 일을 하셨던 거예요. 장기가 파열이 돼서 거의 죽기 직전까지 가셨어요. 수술도 잘못되었고 더 어려워졌고 약간 모았던 대학 등록금 마저도 어머니의 병원비로 사용되었죠.
 

정말로 다사다난 하군요.
것 봐요 구질구질하죠? 아무튼 그렇게 돼서 전 재산이 50만원이었는데 당시에 학사금을 못냈던 때라 대학 지원서를 안 써줬어요. 그래서 그 50만원으로 밀린 학사금을 내고 15만원정도 남은 금액으로 대학원서를 지원했어요. 수능도 조금 망친터라 정말 원하던 학과를 지원할 수는 없었어요. 저에게는 한번뿐인 기회였으니까요. 우울한 이야기 같지만 입시펀딩은 해피엔딩이었어요. 제 합격의 영향인지 출신학원은 대구에서 손꼽히는 큰 학원이 되었거든요.
 

그렇게 해서 대학을 합격하셨군요. 학창시절은 어떠셨어요?
여전히 가난해서 7년 동안 계속 일하고 돈 벌어서 학교를 졸업했어요.
학교를 잘 다닌 건 아니에요. 학점은 낮았고요. 하고 싶은걸 하는 시간이었어요.학원강사로도 꽤 잘나갔어요. 하지만 저도 누군가의 도움으로 학원을 다녔는데 또 비싼 월급을 받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어요. 존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죠.
 

졸업을 한 후엔 어떠셨나요?
제가 영상을 좋아한다는 것. 또한 경제적인 부분에 대한 욕심 뭐 그런 것들로 인해 광고회사에 입사했어요. 그리고 그 업계가 굉장히 서열화 되어 있고 도제식이라서 힘들었어요. 불가능한 것을 되게 해야 하는데 제가 은근히 그 생활을 즐겼더라고요. 그 중간에 회사를 이직하긴 했지만 그 생활을 한 7년 정도 한거죠.
 

마지막 질문으로, 궁극적 꿈은 무엇인가요?
이 사업에 목표는 사업에 매체와 제작사를 함께 갖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거대한 목표는 없습니다. 다만 함께 있는 사람들이 서로 좋아하는 상태로 있는 겁니다. ! 비전은 제주도에서 흰색 큰 개를 키우는 겁니다. 하하.

 

새로운 길로 들어선 박정화 대표의 목표가 잘 이뤄지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