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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과 순환의 아름다운 세상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야기

아름다운가게 평택안중점 명예점장, 이상훈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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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훈 원장이 안중 지역에서 병원을 운영한지 벌써 30년째다.
이미 지역에서 영향력있는 인사가 되었다.
이상훈 원장은 동네에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드러나는 역할’을 맡고 있다고 했다.

아름다운가게 평택안중점은 이상훈 원장이 운영하는 사과나무치과와 같은 건물에 위치하고 있다.
치과 개원 20주년이 되던 2004년도에 그 동안 지역주민들에게 받아온 사랑을 보답하고자 의미 있고 사회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사업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병원직원의 아이디어로 ‘아름다운가게’를 생각해 냈고 치과가 있는 건물 지하에 매장을 얻어 매장공간으로 기증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상훈 원장은 바쁜 진료 중에도 틈틈이 시간을 내어 앞치마를 걸치고 봉사를 한다.
2005년 아름다운가게 매장 개설을 결정하게 된 것도 ‘참여형’의 매장운영 방법이 마음에 들어서다.
나눔과 순환 운동을 위해 여러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내부의 자원과 외부의 자원을 모아 실행에 옮기는 그런 살아 움직이는 운영 방식이 좋았다.


‘어디에 쓸것인가'를 ‘아름다운가게스럽게' 고민해 달라는 말에 이상훈 원장이 가지고 있는 생각과 고민이 녹아난다.
“우리 병원이 전국에서 유일한 노동조합이 있는 병원이에요. 그것이 우리 병원을 ‘우리스럽게’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우리 직원들이 병원을 위해 애쓰고 있다고 보고있어요. 이런 것이 가장 우리 병원스러운 것이지요.
아름다운가게도 아름다운가게스럽게 어떤 길을 가야 하는가에 대하여 계속 스스로 질문하고 답을 찾았으면 해요.”











“정의롭지 못하다고 느껴지던 세상을 변화하는 일이었는데 그게 가능했겠어요? (웃음) 그리고 의사로 살지 않는 것이었지요. 저는 제가 치과대학을 갈거라 생각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한 여성 때문에 제 삶이 바뀌었죠.
제가 고1 여름방학 때, 십몇년 만에 한국에 온 막내 이모 영향이었어요. 그 이모랑 이모부가 열심히 저에게 의사가 되라, 치과대학을 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 말 한마디에 치과대학을 갔지요.
사실 저는 사회학과를 가고 싶었는데 사회학과를 사회학이 아니라 사회복지학과로 이해하고 있었어요. (웃음)
그 이유는 사회사업으로 학교를 운영하셨던 아버지의 영향이었죠. 그런데 갑자기 나타난 이모의 권유에 치과대학을 가버렸으니 당연히 치과대학이 안 맞았어요.

제가 대학 다닐 때가 84년도였어요. 그때의 시대적 상황은 민주화에 대한 갈망이 컸던 시절이었고 하루가 멀다 하고 대학가 시위가 끊이지 않았던 그런 세월을 산 사람으로서 어떤 생각을 했겠어요.
그래서 치과의사가 적성에 맞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여러 가지 가능성을 열어 놓으며 평택안중에서 병원을 시작했어요.
병원 개원의 목표도 얼른 돈을 벌어 다른 일을 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그 다음 병원을 그만두고 원래부터 하고 싶던 일을 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사실 결혼도 안 하려고 했어요. 세상에서 뭔가를 소유한다는 게 어렵고 복잡했거든요.

그런 제게 위기가 왔죠.  90년대 초반쯤 갑자기 삶의 좌표가 없어졌어요.
그 전까지는 제가 흔들린다는 것을 고민해본 적이 없었어요. 집안문제, 이런 저런 문제로 친구 선배가 갈등하더라도, 난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요. 민주화를 위해 고민해왔지만 사실 90년대에는 세상이 많이 바뀌기도 했고, 또한 제 자신의 역량에 한계를 발견하기도 하면서 삶의 좌표를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면서 제가 진짜로 여러 면에서 부족하다는 자괴감 같은 것에 빠져 삶을 정리해야겠다고까지 생각했어요.
그때 우리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씀이 저를 다시 살게 해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길 “네가 하려고 하는 일은 말이야, 나의 살아온 경험에 의하면 일이십 년 안에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람들 모두가 바뀌어야 하는 일이라서 대를 이어서 해야 한다”고.

그러면서 늘 어렵기만 했던 아버지께서 저에게 평생 거의 처음으로 속 마음을 이야기 하시더군요. "아들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너를 좋아한다"고. 그 사건으로 제가 조금은 겸손해지고 주제를 알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어요. 사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결혼도 하게 되었어요."






“현재 한국일보사가 있는 그 동네가 할아버지 고향이었어요. 할아버지는 1895년생인데 초등학교도 안 다니셨지만 아버지 형제분들은 키우는 과정에서 ‘모두 공부를 시켜야 하겠다’ 해서, 동네에 초등학교를 세우는 일에 열심히 관여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젊은 시절부터 삶을 학교를 만드는 일에 집중하셨죠.
할아버지께서 세우신 학교를 아버지가 20년간 운영하시다가 구리지역에 새로운 학교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국내 경기가 많이 안 좋아졌죠. 그러면서 부도가 나서 학교가 없어졌어요. 제 아버지는 당시 정권에 바른 말을 해서 불이익을 당한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래서인지 제가 힘들게 대학을 다닐 때, 아버지가 저를 불러서, 너는 정치를 안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더라고요. 대신 교육은 할만한 일이라고 늘 이야기하셨어요.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말년에 많지는 않지만 일부 재산이 있으셨는데 그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셨나봐요.
하루는 아버지께서 제가 병원 진료 중인데 찾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6남매 중에서 다른 사람은 말고 저에게 재산을 주기로 결심하셨다는 거예요. 부담스러워하는 저를 설득하셔서 할머니와 아버지 재산을 모두 제게 넘기셨죠. 저는 왜 ‘나에게 무거운 짐을 주느냐’고 했지만 그 분들의 결심을 바꾸게 하지는 못했어요.
아버지께서는 우리 가족의 재산이 사적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그렇게 해서 할머니와 아버지의 재산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 지가 제게 떨어진 연구과제였어요.
저는 고민 끝에 평소 교육에 관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유지를 살리자는 취지에서 아버지 재산의 반 정도를 방정환 재단에 기부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저는 그 마름(심부름꾼)으로서 관리차원에서 재단이사를 맡게 되었어요.”











"저는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라고 기억되길 바래요.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고, 모두가 ‘공존’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현재의 자리에서 계획을 실천해 나가는 사람으로 말이에요."

 

 

[ 아름다운가게의 운영 방식에 대해서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풀어 놓으셨다. ]

" 전 영국의 채러티샵(Charity Shop)들이 모두 똑같은지는 모르지만 개인이 운영하는 곳도 많고 물건을 서로 사고 팔기도 한다고 들었어요. 자기 급여를 거기서 받아가는 거에요. 그런 것은 영리기업과 같은 부분이죠.
그런 샵들이 대다수이면서 자원봉사자들이 그런 매장에서 일을 한다고 해요. 단, 매장의 수익을 어느 정도 사회에 환원하느냐는 정책적인 기준이 있을 거예요. 이런 부분은 일반 영리기업과는 큰 차이가 있겠죠.

우리 평택안중점 후원자이던 친구의 부인이 대한생명 FC였어요.
경기도 전 지역에서 1등하고 그런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은 주말마다 아름다운가게에서 장봐가지고 가는 것이 그 사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고 다음 일주일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매주 엄청난 양을 사가요. 돈으로 10만원 이상. 뭐든지 사갔어요. 우리 매장에 이런 물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물건도 잘 골랐죠.
그것을 대부분 선물했다고 하더라고요. 고객을 관리하는 재정설계사로서 ‘아름다운가게’라는 것으로 고객들과 공통의 친밀감을 만들어 가는 거죠. 자기는 이 정도 가격에 이런 물건을 살 수 있는 것이 너무 행복하고, 받는 사람도 너무 행복해 한다고 했어요.

그러다가 어느날 이 사람이 캐나다로 이민을 갔어요. 본인이 우연히 건강검진을 받다가 유방암을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은 거죠. 한국에서 이렇게 살면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삶의 내용과 공기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하고 캐나다로 간 거예요. 거기서 채러티샵을 인수했어요. 부인이 벤쿠버에서 채러티샵을 하고 남편은 정원사를 해요.

이처럼 아름다운가게도 수익에 대하여 일정 부분만 욕심없이 가져가고 그 나머지는 사회에 환원하는 방식 등, 계속 새로운 방식을 고민해 보면 좋을 것 같아요.”


[ 당장 현재의 아름다운가게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부분이 있었지만, 새로운 아이디어의 가능성들을 제안하는 모습에서 청년의 열정 못지 않은 진취성과 오랜 시간 공부하며 체험한 중년의 지혜를 함께 느낄 수 있었다. ]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가는데 건물 1층 로비에서 동네 할머니 두분께서 오후 진료를 기다리고 계셨다.
원장님과 헤어지는 우리의 모습을 보고 ‘저 분이 참 꼼꼼하고 친절하게 잘 봐. 그래서 내가 먼 데도 여기 다니잖아요.’

꼼꼼한 명예점장에서 다시 동네의 친절한 치과의사로 돌아간 이상훈 원장.
원장의 그 열정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상훈 원장이 서울에서 안중까지 내려왔다며 선물을 줬다. 직접 담근 된장이었다.
된장 담그는 남자, 치과의사 이상훈 원장, 마음으로 청년의 삶을 살아가는 그분의 모습에서 아름다운가게가 좀 더 분발해야 하는 이유를 발견했다. (끝)


 

 

 

인터뷰어 l 아름다운가게 도너클럽